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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따라 길 따라 곤강선생 족적을 더듬다


○ 이상한 가계
2014년 5월 11일 당진문인협회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충남남도의 사업비 지원을 받아 윤곤강 선생의 묘역을 정비하는 사업을 많은 회원들이 모여 말끔하게 끝냈다. 하느님도 예쁘게 보셨는지 일을 마친 뒤에 비를 촉촉하게 뿌려서 새로 입힌 잔디에 기운을 불어넣어주셨으니 선생도 지하에서 기쁘게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선생은 관향이 漆原으로 아버지 尹炳奎 어머니 金安洙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앞서 연구자들 중에 그런 결과를 내놓은 경우도 있고 나도 그 설에 동조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3남 3녀라고 주장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선임 연구자들이 있다. 그 주장하는 가게는 다음과 같다.



金安洙   ―    尹炳奎   ―   城本福嬉
                           
           朋遠(1911. 9. 24)                競遠(1943. 1. 19)
           順遠(1915. 5. 9)
           弼遠(1917. 11.10)
           福遠(1921. 1. 10)
           奭遠(1026. 4. 17)
           喜遠(1949. 5. 15

그런데 이 가계도를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윤병규는 1883. 4.20(음) 출생하여 1951. 4. 1(음)타계했고, 김안수는 1879.11.26 출생하여 1951.12.29일 타계하였으니  희원이 태어난 1949년이면 우리 나이로 71세가 된다. 과연 71세의 여자가 출산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희원의 호적서류에 힌트가 숨어 있다. 윤병규나 김안수 모두 시곡리 367번지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타계했다. 그런데 희원이 태어난 곳은 원당리 958번지이다. 원당리 958번지는 병규의 제2부인이 살던 집이다 본부인이 자기가 사는 집을 놔두고 남편의 작은 부인 집에 가서 출산을 했다는 것이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말인가? 이는 71세의 본부인이 출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반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당진과의 인연
선생은 원래 서산에서 태어나셨지만 당진에는 입향조(入鄕祖)로 추정되는 그의 선대 묘소가 모셔져 있고 선생도 어려운 시절에는 당진에 오셔서 지친 몸을 추스르셨으니 출생지 못지않은 인연이 있다 할 것이다. 엊그제 충남 문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김현정 교수가 답사를 나와 고완수 선생과 함께 안내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알아냈고 고 선생이 사진도 많이 찍고 하였기로 1999년도에 안내 글을 쓰면서 범했던 오류도 수정할 겸해서 곤강선생의 체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崑崗 尹朋遠 선생은 1911년에 태어나 암울했던 국권 상실시대와 광복 후 혼란했던 시대를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세상을 떴다. 40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 짧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 시론집 ‧ 고시가 주해서 등의 저술과 6권의 시집을 남긴 결코 우리문학사에서 가볍게 보아 넘길 인사가 아니다. 전날에 정읍인가에서 현지답사를 하겠다고 안내를 부탁받아 안내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말이 ‘알만하다고 생각되는 기관 두어 군데에 전화를 했는데 모른다고 하여 어렵게 나에게 연락을 했노라’ 며 나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나는 될 수 있으면 여러 사람이 알고 있어서 외지에서 답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쉽게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지난 해 당진문인협회 회원들과 답사를 하였었다.  이번에는 작년 답사 때 미쳐 못가 봤던 곳까지 답사를 하였기로 이를 요약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 읍내 옛 집
계성 초등학교 후문 앞 부근에 있었다. 계성 초등학교 앞 4거리에서 옛날 원당리 당진자동차학원으로 넘어 다니던 길로 들어가다 계성 초등학교 후문 좀 못 미쳐 길 왼편에 있었다. 현재는 도로도 확장되고 근처가 많이 바뀌어 정확한 위치를 짚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밤절로 2-33, 현대 종합주방 남동쪽, 계성초등학교 누리관 건너편쯤에 있었다. 전에는 계성초등하교 후문 옆 도로(지금의 당진중앙1로)가 조그마한 승용차 한대 다닐 정도의 도로였고, 2008년 무렵 민종기 군수 시절, 도로가 확장되기 전까지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도로가 확장되면서 헐렸다. 

윤곤강 선생은 1944년 둘째 부인 김원자와 사별하고 가족과 함께 내려와 당진면서기로 근무하면서 살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상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로는 선생의 부친이 살았다고 하는데 1950년 6월 6.25가 터지자 시곡리로 이거하였고, 곤강선생 유족들도 피란 내려와 처음에는 여기에서 거주하였는데 인민군에게 점거당하여 시곡리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집은 그 뒤로도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차녀 명순의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시고 전쟁이 끝난 뒤에 어머니(선생의 본부인)가 처분하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1883년(癸未) 음력 4월 20일 출생하여 1951년(辛卯) 4월 1일에 타계하였고,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되었으니 이 집을 처분한 것은 1950년대 중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 선생의 사촌 댁
당진시 시곡로 62-9 옛 지번으로는 당진읍 수청리 41번지다. 묘소가 있는 산 반대편 자락이다. 산을 타고 넘을 수 있으면 지척이지만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고 길이 없어 넘어 다닐 수는 없다.

당진 시내에서 순성 쪽으로 가다보면 수청리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 옆으로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교회가 있고 좀 더 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농가가 있으니  이 집이 곤강선생의 숙부댁으로 전에 필자가 답사당시인 1999년에는 선생의 숙부는 타계하시고 숙모와 사촌 윤정식씨가 살고 있었는데 이번 답사(2014,6,29) 때에는 사람이 살지는 않고 관리만 하고 있는듯하여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 묘소
당진 무시동 4거리에서 615번 지방도로 순성 쪽으로 3Km 남짓 가다 보면 길 오른편에 윤곤강 시비가 세워져 있고, 길 왼편에 윤곤강 묘소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옆으로 마을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400m쯤 가면 다시 안내 표지판이 있는 갈림 길이 나오는데 왼편으로 들어가면 산 밑 조그만 주차장에 다다른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묘소가 올려다 보인다. 묘소에는 나루문학회에서 세운 아담한 표석과 유족이 세운 묘표가 세워져 있다.


 이 묘소는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는데 1987년쯤으로 기억되는데 나루 문학회 회원 중에 몇 사람이 그 때 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윤 곤강 선생의 묘소가 당진에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어 어렵사리 찾아냈고, 찾고 보니 관리가 너무 허술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회원들이 표석을 세우기로 뜻을 모아 1992년 7월 17일에 아담한 표석을 세우게 되었는데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남의 묘에 비석을 임의로 세울 수는 없는 일인지라 후손들에게 뜻을 전달하여 회원들과 후손들이 모여 간소한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후손들이 고맙고 면목이 없다며 큰길 입구에 안내표지판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외지에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묘소가 당진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안내를 받기 위하여 군청 문화 공보실에 문의 전화를 하였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담당 계장이 생각 해 보니 외지 사람도 알고 찾아오겠다는데 문화 공보실에서 모른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소재지를 알아내고, 안내를 하여 주기로 하고 그 길로 자기가 먼저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가보니 큰길가에 안내 표지판이 사제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때까지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던 문학 단체에서 표석을 해 세웠으니 문화 관광을 담당하는 관공서에서 손 발 놓고 있었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규격에 맞게 안내 표지판을 만들어 세우려고 생각하니 아무리 규격품은 아닐망정 개인이 사비로 만들어 세운 것을 뽑아 버리는 것도 안 되는 처사란 생각이 들어 큰길가에는 군청에서 만든 규격품을 세우고 그곳에 있던 먼저 것은 마을 안쪽 길옆에 갔다 세워 놓아 제법 안내만은 친절하게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곤강선생 묘소 위쪽에는 큼지막한 봉분의 오래된 묘소  2기가 있다. 바로 위의 묘소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편창군수를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된 윤유길(尹有吉)의 묘소로 묘포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백십삼 년 경신(庚申)에 세운 것이다. 이 연대를 서기로 환산하면 1740년인데 글씨를 현손(玄孫) 경룡(敬龍)이 썼다하였으니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묘소의 주인은 1620년경에, 그 위의 묘소를 바로 윗대로 가정하면 그는 1590년대 사람으로 상정해 볼 수 있겠으니, 1592년 4월에 발발하여 7년을 치룬 임진왜란 무렵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윤곤강 선생의 차녀 윤명순은 나와 당진중학교 동기 동창으로 그녀에게 그들의 선대가 언제 당진에 입향하였는지를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고 ‘무슨  난리를 피해 당진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더라’고 들었다고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맨 위의 묘소의 주인공이 임진란을 피해 당진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부친 및 장남 종호 묘소
곤강선생 묘소의 앞들 건너편 산에 그 선친 尹炳奎씨의 묘소가 있다. 선생의 묘소에서 시곡리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왼편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있는데 이길 끝에는 농가가 있다. 농가 조금 못미처에 오른편으로 묵정밭이 보이고 묵정밭 옆으로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선생의 선친 炳奎의 묘소가 있고 봉분 왼편 옆에 선생의 장남 鍾滈의 유골 묘가 있다.

할아버지의 묘소에 손자의 묘소를 같이 쓴 것도 특이하다. 묘소 앞에는 화강석의 상석과 오석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상석 전면에는 漆原尹公炳奎之墓 配 光山金氏祔左라 새겼고, 상석 좌측면에는 癸未 四月卄日生 辛卯四月一日卒, 옆으로 자손들을 새겼는데 子 朋遠. 竸遠, 孫 鍾滈. 鍾虓 婿 李俊求. 朴商穆이라 새겼다.

송덕비는 전면에 前 參奉尹公炳奎頌德碑라 새기고, 좌측면에 素性好善 澤及鄕隣 儉歲傾囷 白屋擧火 代石爲頌. 우측면에 公承世業 克繼先志 惟我小農 偏蒙其初 孝友之家 慈思斯人. 후면에는 본 頌德碑는 現在 瑞山郡廳 後面에 建立한 副碑로써 生存時에 不孝를 늬우처 父母任을 思慕하면서 본 副碑를 建立하나이다 西紀一九八七年 四月 六日 子 競遠. 女 順遠. 福遠 이라 새겼다.

 곤강 선생은 아우가 셋이고 누이가 셋이다. 선생의 본명은 朋遠으로 장남이고 막내남동생이 競遠인데 상석에 둘째, 셋째 아우 막내여동생의 이름은 빠져 있다. 또 송덕비 후면에는 장남과 차남, 삼남, 막내딸은 빠지고 넷째와 두 딸만 올라 있다.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 시곡리 옛집


시곡리 367번지. 묘소에서 시곡리로 넘어가는 마을길을 따라 가다 보면 갈산리와 시곡리의 경계쯤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서 세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조금가면 다시 세거리가 나온다. 왼쪽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오른쪽 논과 논사이로 조붓한 농로가 있고 논머리에 컨테이너박스가 놓여있다. 컨테이너박스가 놓인 자리가 집터이다. 지번은 시곡리 367번지라고 한다(1999년 당시 이집을 관리하던 김영배씨 증언). 윤명순의 증언에 의하면 이집은 원래 산직이(토지관리인을 지칭하는 듯하다)집이었는데 1934년 5월 곤강선생이 제2차 카프에 연루 검거되어 전북 장수에서 약 3개월간 복역 후 석방된 후에 낙향하여 기거한일이 있었고 1950년 6.25가 나자 읍내리 집에서 살던 선생의 아버지가 들어가 살고 있었으며, 선생의 가족들도 피란 내려와 처음에는 읍내리 집에서 살다가 인민군에게 점거당하여 시곡리 집에 합류하였었다고 한다. 2014. 7.25 윤곤강 포럼에서 김현정교수의 발표문에 어느 연구자의 글 중에 당진읍 폐곡리란 기술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아마 이는 柿谷里의 柿(감시)를 杮(대패밥폐)로 잘못 읽은 것이 아닐까한다. 柿자와 杮자는 작은 글씨로 인쇄했을 경우 거의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柿(감시)는 나무목(木)변에서 5획이고,  杮(대패밥폐)는 나무목(木)변에 4획이다. 당시에 시곡리에는 곤강선생의 고모도 살고 있어서 자주 왕래했었다고도 한다. 차녀 명순도 시곡리에 살면서 국민학교는 기지시국민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는 시곡리에서 당진중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 곤강선생 서모의 옛집 터
당진시 원당로 51-21(옛 지번으로는 원당리 958번지). 묘소를 거쳐 시곡리 옛집을 보고 감골주유소 근처로 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오다 송산 쪽으로 빠져나와서 32번국도의 구도로 원당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오면 오른 쪽으로 비발디아파트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로 들어서서 앞쪽을 보면 산 밑에 당진순복음중앙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들어선 자리가 윤시인의 서모가 살던 집이 있었던 자리이다. 1999년 필자가 답사할 때에는 세탁소와 자동차 매매 상사가 있고 그 사이로 들어가면 세탁소  뒤에 집 옆과 마당가에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 있는 아담한 팔작지붕의 기와집이었었는데, 문패에는 박 의환이라 되어 있고 우편함에는 백 종호라 쓰여 있었다. 썩 훌륭한 집은 아니지만 정갈하니 곱게 늙고 있어 부유한 남정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여인의 체취가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2014, 6, 29 현재)은 이지역이 재개발되어 바로 옆에는 비발디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그 집터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출처 : 한국문인협회 당진문학 13호 발췌, 시인 윤성의>
<도움 주신 분 : 한국문인협회 당진지부 시인 황영애>